아메리칸 사이코 (By 브렛 이스턴 엘리스) hAnD


    무감각의 지옥이 빚어내는 카탈로그 호러


‘이곳에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

단테의 ‘신곡’ 지옥편의 문구를 인용하며 시작하는 소설은 명확하게 독자를 현실의 지옥으로 초대한다. 그런데 이 지옥은 중세의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파생된 죄와 벌의 향연과 그 안에서 드러나는 인간적 고뇌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무감각의 지옥이다. 예컨대, 신곡의 우골리노 백작은 자식의 시체를 먹은 엽기적인 죄를 저질러 지옥에서 고통 받고 있지만, 이 이야기에는 받아들일만한 전후와 맥락이 존재하며, 굶주림이라는 고통과 절망에 대한 묘사가 들어 있다. 그러나 ‘아메리칸 사이코’의 패트릭 베이트먼은 아무 이유 없이 여자들을 무차별적으로 살해하고, 뜯어먹으며, 요리한다. 이 지옥에는 감정이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사물이고, 상품이다. 심지어 화자인 베이트먼 자신도 사물에 불과하다.


패트릭 베이트먼이라는 악마는 소설 속에 언급된 대로 하나의 개념, 추상이다. 그는 현대 소비사회로 불려나온 종이인형과 같다. 이 종이인형은 내면이 없으므로, 외부의 소비품으로 치장을 그치지 않는다. 끊임없이 언급되는 명품 브랜드들, 가전제품에 대한 설명서 보다 자세한 묘사, 이국적인 요리들의 외양(맛은 중요하지 않다), CD 부클릿에 적힐 만한 음반평, 어딘가에서 아름답고 정치적으로 올바른 말만 따온 것 같은 그의 현실인식, 이 모든 것이 어울려 소설은 마치 화자가 애용하는 잘 빠진 잡지를 읽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 카탈로그의 세계는 화려하고 명징하며, 더듬거리는 법이 없다. 반면 베이트먼의 주변에서 실제 ‘사람’으로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모호하고, 베이트먼처럼 얄팍하다. 그들의 중심 없는 대화는 늘 엇나간다. 아무도 서로의 말을 듣지 않는다. 관계는 삐걱거린다. 아니, 사실 관계라고 정의할 만한 관계는 하나도 없다. 베이트먼은 늘 누군가를 누군가로 착각하고, 그들도 베이트먼을 늘 다른 이름으로 불러댄다. 그렇게 베이트먼은 진정한 실체를 갖추지 못한 채 끝없이 떠다닌다. 사실 종이인형은 모두 비슷해, 구별이 어렵다. 잡지의 비싼 명품을 입어도, 좋은 가전제품을 써도, 이름난 식당에 가서 유명한 요리를 먹어도, 이 익명성은 사라지지 않는다. 모두가 그렇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설 내의 잔인한 살해 장면과 포르노적인 성애묘사는 이 한 권의 명품 잡지에 들어있어서는 안 되는, 불길하고 끔찍한 소비사회의 배면을 드러낸다. 별다른 플롯도 없이, 역설적으로 살해와 섹스만이 작품 내에서 유일하게 생기를 띤다는 점을 주목한다면, 작가인 브렛 이스턴 엘리스가 단지 변태적인 취향을 만족시키기 위해 이런 구성을 취하지 않았음은 금방 눈치 챌 수 있다. 지루한 상품광고의 나열, 종잡을 수 없는 잡담의 행렬과 충격적인 육체의 훼손은 서로 대비되어 서로의 색깔을 분명하게 한다. 베이트먼이 출구로 선택한 이 극단적인 길은, 그러나 금방 생동감을 잃고 또다시 거대한 소비문화로 포섭된다. 종이인형은 사실 자신이 관람한 유혈낭자한 포르노를 ‘따라하고’ 있을 뿐이다. 그에게는 자신만의 것이 없다. 순간적으로 그것을 뛰어넘는 창작성을 발휘하기도 하지만(예를 들어 자신의 아파트에서 발견한 쥐를 이용하는 고문), 결국 그의 살해행위와 잔인한 고문 역시 조금 별난 포르노 잡지 안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이 지점에서 결국 소설은 무시무시한 공허와 공포를 자아낸다. 고문포르노 잡지와 명품 브랜드 잡지가 교접된 이 세계에서 사물화 되지 않은, 진정으로 인간적인 행위는 아무 것도 없으므로.


‘아메리칸 사이코’는 80년대 말 아메리카의 여피(Yuppie)라는 한정된 시대와 계층을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있지만, 그것을 뛰어넘는 지평을 획득한다. 대량생산, 대량소비시대의 문명과, 그 안에서 방황하는 한 괴물의 초상은 부분 부분 현대인의 내부에 도사린 괴물과 겹친다. 소설 속에서 ‘휴이 루이스 앤 더 뉴스’가 ‘사랑의 힘(Power Of Love)'을 신나게 불러대도, ’휘트니 휴스턴‘이 ’무엇보다 위대한 사랑(The Greatest Love Of All)'을 목청껏 외쳐도, 그런 사랑은 노래 속에만 있다. 잡지들의 세계인 이곳에는 없다. 그렇다면 출구는? 소설의 마지막 문구대로 ‘이곳이 출구가 아님’은 명백하다. 그러나 길을 찾는 것은 우리 시대에는 요원해 보인다. 오늘도 피상적인 인간관계 안에서 패션과 가전제품, 사는 아파트 등으로 스스로를 타인과 구별해야만 하는, 더 사랑하고 베푸는 것보다는, 상품을 더 많이 갖는 것에 골몰하는 우리는, 종이인형 베이트먼의 모습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을까. 소설의 마지막장을 덮으며 극도로 숙연해진 마음을 쓰다듬으며 떠올린 이 의문은, 이 파괴적인 작품을 읽은 독자들 모두의 뇌리에 선연할 것이다.


덧글

  • 병윤 2009/09/08 09:32 # 삭제 답글

    목요일 저녁 광화문. 한재각-최형섭과 청요리 디너 예정. 참가가능하신가? 썹은 당신을 보고 싶어하네. (현재 구성원 확보 중. 김기상 대리 섭외중)

    연락주시게. 병윤: 010-7750-9172 byoonkim@gmail.com

    글에 대한 느낌 (1) 소설도 19금이 있구먼. (2) 쉼표는 과거보다 많이 줄었네. 나이를 먹어가는 구먼.
  • 디오니 2009/09/08 16:06 #

    다른 날도 많구만 왜 목요일인가요. 허허. 그날 뭔 일이 있는데 말이죠. 암튼 전화 드리지요.

    글에 대한 느낌 (1)은 글에 대한 느낌이 아닌데? 사진에 대한 느낌. 쉼표라...아니, 이것도 글에 대한
    느낌 아님. 문장부호에 대한 느낌. ㅎㅎ

  • 병윤 2009/09/08 17:42 # 삭제 답글

    방금 최형과 통화완료. 최고 흥행카드인 당신이 불참하면 안되는데...

    본인이 재료과인 지라, 각-섭-윤 미팅이라는 크리티컬매스를 넘는 코어를 형성한 후,
    growth단계를 실시했는데, 현재 태곤, 기상, 전주용(!!!), 수경을 확보했소. 당신 어부인은 힘들겠다는 반응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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