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의 눈물 hEaRt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199156&CMPT_CD=P0000

 

유달산 아래에서 내려다 본 도시의 모습은 언제나 똑같았다. 일곱 살에 아빠 손에 이끌려 올랐을 때나, 머리가 커져 술병을 들고 친구들과 같이 올랐을 때나. 도시는 바다에서 불어오는 소금기 섞인 냄새에 감싸여 있었고, 늘 축축하고 무거운 분위기를 풍겼다. 뒷골목에서는 중, 고교에서 짱 먹던 놈들이 슬슬 무슨 무슨 파에 들어가 중심상가 근처에서 출몰한다는 얘기들이 돌았고, 집 근처 놀이터에서는 누군가가 누군가의 칼침을 맞아 죽었다는 얘기가 괴담처럼 떠돌았다.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다. 우리는 늘 똑같았다.

12살 때 처음 광주사태 (그때는 아직 이렇게 불렀다) 사진전에 가서 탱크에 갈렸다는 누군가의 처참한 얼굴, 아니 살과 핏덩어리를 봤고, 계엄군의 무자비한 총칼을 목격했다. 무서워 벌벌 떨면서, 다음날 아침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옆집의 아줌마는 어머니에게 그 당시 광주로 들어가다가 길가에서 잘린 손목을 봤다는 얘기를 했고, 우연히 그 얘기를 듣게 된 나는 또 벌벌 떨었다. 중학교 시절 어떤 선생님은 전라도 사람은 뭘 해도 안 된다는 말을 푸념과 자조 섞은 채, 아무 것도 모르는 까까머리들에게 내뱉었고, 우리는 아무 것도 몰랐지만, 뭔가를 알고 있었다. 이곳에서 벗어나면, 이 우리에서 나가면 차별과 멸시가 쏟아지리라, 그런 강한 예감은 머리가 굵어져감에 따라 점점 불길한 확신으로 변해갔다. 아무 것도 몰랐지만, 내 어머니가 TV를 보면서 전라도 사람은 왜 만날 깡패나 가정부로 나오느냐고 지나가듯 불평하셨을 때, 그 의미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도시를 떠나 처음으로 사귄 여자의 어머니가 고향이 어디냐고 물었고, 머뭇거리며 목포라고 답하며, 순간적으로 변하는 그 어머니의 눈빛을 보았다.

누구도 정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할 필요가 없었다. 무거운 역사가 도시 전체를 누르고 있는 상태에서, 저발전의 폐쇄된 도시가 한 줌의 희망을 걸고 있는 것은 그곳에서 배우고, 그곳에서 처음으로 의원이 된 입지전적인 한 사람이었고, 그래서 그 사람은 도시의 밑바닥에, 의식과 무의식에 침전물처럼 고여 있었다. 그를 통해 아무 것도 변하지 않는 도시가 변하리라는 믿음은 확고했다. 그의 싸움과 인생은 우리의 것으로 동일시되었고, 우상화되었고, 어느 면에서는 신격화되었다. 그래서 그는 사람이라기보다 상징으로, 도시의 배면에 웅크린 동상이 되어갔다. 그 무시무시한 기대와 희망이 한 사람의 좁은 어깨에 걸리는 상황은 도시와 그 사람을 동시에 소외시키는 것이었지만, 그렇다면 어떤가. 숨구멍이 그것뿐이었고, 누구라도 숨은 쉬어야 했다. 도시가 그 무거운 짐을 지웠음에도, 그는 불평하지 않았다. 아니, 불평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닫히면 그 어디에도 출구가 없게 됨을 분명히 알았을 것이다. 서로가 소외됨에 따라 온갖 해악이 악귀처럼 따라붙었지만, 모리배가 그를 등에 업고 출마해도 떡하니 의원배지를 달게 되는 상황이 벌어졌지만, 도시는 그라는 공기마저 없었다면 질식했을 것이었다.


그가 떠나고, 도시의 누군가는 딸의 손을 잡고서 그를 추모한다. 땀내처럼 시큰한 바다 바람이 역전에 마련된 분향소의 향에서 피어난 연기를 감싸고 돌 것이다. 골목의 술집에서, 복덕방에서, 미용실에서는 애도의 대화들이 떠돌 것이다. 그와 도시가 서로 맹목적으로 기댔던 시대는 이제 저물었지만, 도시가 아프고 절절하게 울지는 않겠지만, 그에 대한 기억과 아련한 상실감은 오래도록 남을 것이다. 술 한 잔 걸치고 이 시시껄렁한 잡문을 휘갈기는 내게 그렇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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