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밀밭의 파수꾼 (by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hAnD


센트럴 파크 연못의 오리들이 겨울이 되면 어디로 갈지가 궁금한, 조울증 소년 홀든 콜필드의방랑기. 나는 이 소설을 7년 전에 읽었고, 이번 추석에 귀향해서 책장을 둘러보다가 손에 잡히는 대로 들고 와서, 어제 새벽에 재독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내가 이 소설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재미있는 책도, 흥분시키는 책도, 날 우울하게 만드는 책도 많고 많지만, 좋아하는 책을 찾기란 쉽지가 않다. 아니, 아마 이 책이 거의 유일하지 않을까(라고 쓰고 보니 몇몇 소설이 떠오르긴 하지만). 소설에 나오는 말처럼, 샐린저에게 전화라도 걸어보고 싶은 기분이 들 정도니까.

나는 고전소설들을 많이 읽었다. '귀향'과 같은 책들을 좋아하고, 많은 전쟁소설과 미스터리물도 읽었다. 하지만 그 책들은 그렇게까지 내게 강한 인상을 주지는 못했다. 정말로 나를 황홀하게 만드는 책은, 그 책을 다 읽었을 때에 작가와 친한 친구가 되어 언제라도 전화를 걸어, 자기가 받은 느낌을 이야기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느낌을 주는 책이다. 물론 그런 일은 그렇게 자주 일어나는 일은 아니었다. 이삭 디에센과 같은 작가는 전화를 걸고 싶은 사람이다. 링 라이더도 마찬가지이지만, 형 말에 따르는 그는 죽었다고 했다. 지난 여름에 읽었던 서머싯 몸의 '인간의 굴레에서'와 같은 책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면, 상당히 좋은 책임에는 분명하나, 몸에게 전화를 걸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만들지는 못했다. 어째서 몸이 전화를 걸고 싶지 않은 사람에 들어가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보다는 차라리 토머스 하디에게 전화를 걸고 싶다. 난 유스티셔를 좋아하니까.

홀든 콜필드는 사소한 것과 죽어버린 것들, 정지해서 변하지 않는 것들에서만 진짜 가치를 느낀다. 거대하고 중요한 것, 아이에서 어른으로 변해버린 사람들은 그에게 조금의 감흥도 주지못한다. 그는 동생 피비에게서 제일 좋아하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듣고 생각한다.

"진짜 좋아하는 것."

"좋아." 난 대답했다. 하지만 문제는 여전히 집중이 되지 않는다는 거였다. 생각나는 거라고는 낡은 밀짚바구니를 들고 다니며 성금을 모으던 수녀 두 명뿐이었다. 특히 철테 안경을 쓴 수녀가 생각났다. 그리고 엘크톤 힐즈에서 알고 지냈던 아이가 떠올랐다. 제임스 캐슬이라는 아이였는데, 필 스태빌이라는 거만하기 짝이 없는 놈에 대해 자신이 한 말을 절대로 취소하지 않았던 친구였다. 제임스 캐슬은 그 자식을 거만한 녀석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 말을 스태빌의 친구 중 치사한 놈 하나가 스태빌 자식에게 고자질을 했던 것이다. 그놈은 지저분한 녀석들 여섯 명을 이끌고 제임스 캐슬의 방으로 쳐들어가서는, 방문을 걸어 잠그고 그 말을 취소하라고 위협했다. 하지만 캐슬은 취소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자 놈들이 캐슬을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정말 말로는 할 수 없는 짓들을 했다. 너무 끔찍했다. 하지만 캐슬은 끝까지 그 말을 취소하지 않았다. 누구라도 제임스 캐슬이 어떤 아이인지 한번 봐야 한다. 그 애는 말라비틀어졌을 뿐 아니라, 몸집도 작고, 연약했다. 손목이 연필 굵기 정도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결국 그 아이는 자신의 말을 취소하지 않은 채, 그대로 창문으로 뛰어내리고 말았다. 그때 난 샤워를 하고 있었는데 뭔가 땅바닥에 쿵 하고 떨어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난 창으로 뭔가 떨어진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라디오나 책상 같은 게. 설마 사람이 떨어졌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모두들 황급히 복도를 뛰어 내려가는 소리가 들려서, 나도 목욕 가운을 입고 서둘러 계단을 내려가 보았다. 그랬더니, 돌계단 위에 제임스 캐슬이 쓰러져 있었다.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로, 이빨이며 피가 사방으로 흩어져 있었다. 아무도 그 옆에 다가가려는 사람이 없었다. 그때 그는 내가 빌려준 터틀넥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그런 짓을 저지른 놈들에게 학교에서 내린 조치는 고작 퇴학이었다. 그놈들은 감옥에 가지 않았다.

그 순간 생각이 아는 건 이것뿐이었다. 아침식사를 할 때 만났던 두 명의 수녀와 엘크톤 힐즈에서 알았던 제임스 캐슬이라는 아이.

그래서 아이들은 그에게 특별하다. 변하기 이전의 존재로서, 사소한 것들의 집합으로서.

"아빠가 오빠를 죽일 거야. 분명히 죽일 거라구." 피비가 말했다.

그렇지만 난 그 애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다른 생각, 아니 미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내가 뭘 하고 싶은지 알고 싶어? 내가 뭐가 되고 싶은지 말해 줄까? 만약 내가 그놈의 선택이라는 걸 할 수 있다면 말이야."

"뭔데? 말 좀 곱게 하라니까."

"너 '호밀밭을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는다면'이라는 노래 알지? 내가 되고 싶은 건..."

"그 노래는 '호밀밭을 걸어오는 누군가와 만난다면'이야." 피비가 말했다. "그건 시야. 로버트 번스가 쓴 거잖아."

"로버트 번스의 시라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어."

그렇지만 피비가 옳았다. '호밀밭을 걸어오는 누군가와 만난다면'이 맞다. 사실 난 그 시를 잘 모르고 있었다.

"내가 '잡는다면'으로 잘못 알고 있었나 봐." 나는 말을 이었다. "그건 그렇다치고, 나는 늘 넓은 호밀밭에서 꼬마들이 재미있게 놀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고 했어. 어린애들만 수천 명이 있을 뿐 주위에 어른이라고는 나밖에 없는 거야. 그리고 난 아득한 절벽 옆에 서 있어. 내가 할 일은 아이들이 절벽으로 떨어질 것 같으면, 재빨리 붙잡아주는 거야. 애들이란 앞뒤 생각 없이 마구 달리는 법이니까 말이야. 그럴 때 어딘가에서 내가 나타나서는 꼬마가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거지. 온종일 그 일만 하는 거야. 말하자면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고나 할까. 바보 같은 얘기라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정말 내가 되고 싶은 건 그거야. 바보 같겠지만 말이야."

한참 동안 피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변치 않는 것은 기억되지 않는다. 죽음은 쉽사리 사라진다. 사소하여 무가치하다고 세상이 정의해 버린 많은 것들을 여전히 기억하고,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미성숙의 증거다. 호밀밭의 파수꾼은 성장소설 따위가 아니다(콜필드는 쥐뿔도 변하지 않았다). 소설은 그런 미성숙의 기억과 기록이다. 7년 전 읽었을 때, 나는 슬펐고, 어제 읽었을 때의 나는, 씁쓸했다. 나는 그 사이 세상이 말하는 성숙으로 몇 걸음쯤 더 걸어 들어왔고 그 때문에 많은 것을 잊어버리고, 잃어버렸다. 그 때문에 무언가가 그립고, 그 때문에 어느 날 새벽에 두서없는 소설을 두드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말아라. 말을 하게 되면, 모든 사람들이 그리워지기 시작하니까.

하지만 말하지 않으면, 우리 모두는 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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