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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포한 입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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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기대는 하지 않고 전화를 걸었는데 FHMP의 여직원은 상당히 친절했다. 나는 아는 사람에게 소개를 받아서 전화를 걸게 되었고 솔직히 그쪽이 무슨 일을 하는 회사인지 잘 모르겠으니 설명을 좀 해 달라고 부탁했다. 여직원은 상큼하게 느껴지는 목소리로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 무엇이든 하지요. 고객 분을 행복하게 해드릴 수 있다면, 저희 회사는 못 할 게 없답니다. 자세한 세부사항은 나오셔서 상담을 한 후에 결정하시면 됩니다. 상담시간을 잡으시겠습니까?
거실 TV 화면에는 전국의 지도가 나오고 있었다. 나는 도시에 황사 현상이 있으리라는 예보를 들으며 이왕 전화까지 건 것 한 번 방문해 보는 것도 괜찮으리라 생각했다. 여직원은 마지막까지 친절한 음성으로 자세한 위치를 가르쳐 준 후 정중한 인사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사실 나는 어떤 회사라도 남편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남편은 어떤 심리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고 남편에게 필요한 것은 병원이나, 아니면 일의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기 위한 잠시의 휴식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결국 외출 준비를 하고 여직원이 가르쳐 준 회사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남편에게 정신과 상담을 받아보라고 말할 수도 없었고 휴식을 권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그냥 두고만 보기에는, 남편은 어딘지 위험한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 것 같았다.
차가 심하게 막혀 집을 나선 지 두 시간 만에야 여직원이 가르쳐 준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시청 옆에 있는 이십 층 정도의 빌딩이었다. FHMP는 그 빌딩 8층의 넓고 한적한 복도의 끝에 있는 두꺼운 유리문 뒤에 자리 잡고 있었다. 복도에는 창이 하나도 없었고 대신 이 미터 정도의 간격을 두고 조명이 벽에 붙어서 은은하게 빛을 뿜었다. 복도 끝의 유리문에는 선명하게 Fitter․Happier․More Productive 라고 적혀 있었다. 묘한 회사명이었다.
나는 문 앞에서 들어가기를 망설이며 무엇을 위해 이 회사까지 와서 이 앞에 서 있는 지 스스로에게 물어 보았다. 남편은, 그러니까 요새 들어 매사에 우울하고 의욕이 없고… 또 개미들에게 끓는 물을 부어요, 이건 정신병 같은 건가요? 정신병이라니? 남편은 위장병을 나는 생리불순에 가끔 편두통을 앓긴 하지만 그런 성인병은 다른 사람들이 겪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고 대체로 우리는 건강한 편에 속했다. 그런데 갑자기 정신병이라니? 정신병을 일으킬 만한 심각한 문제는 전혀 없었다. 남편은 오 년 전에 한 번 사기를 당한 적이 있고 삼 년 전에는 횡단보도에 서 있던 칠십 대 노파의 발등을 친 - 남편은 사고 후에 그런 늙은이가 왜 밖에서 싸돌아다니는 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곤 했다 - 사고를 저지른 적이 있지만 그것만이 내가 기억하는 유일한 큰 사고일 정도로 여태까지 평온하게 살아왔다. 올해 초등학교에 들어 간 아이와 결부된 문제도 없었다. 민이는 제 나이 또래보다 조금 더 어른스럽다는 점을 빼고는 그저 보통 아이였고 아버지에겐 착한 아들이었다.
갑자기 잘못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문제랄 것도 없는 사소한 변화에 트집을 잡는 꼴이었다. 남편은 늘 내게 사람이 왜 그렇게 생각이 없느냐고 타박을 줬는데 이번에도 생각 없이 일을 저지르고 있는 것 같았다. 불편해진 나는 돌아가기로 마음을 먹고 몸을 돌렸다가 그만 깜짝 놀랐다. 고양이처럼 소리도 없이 누군가 다가와 있었던 것이다.
“무슨 일이시죠?” 매끄러운 유리잔의 표면을 연상시키는 외모의 검은 정장을 걸친 삼십대 남자였는데 나를 보며 살짝 웃고는 말했다. 상당히 건조한 웃음이었다. “오늘 상담 때문에 오신 분이십니까?”
“아, 네.” 나는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대답했다. 남자는 미끄러지는 것처럼 움직여 나를 스치더니 회사의 유리문을 살짝 열었다.
“망설이고 계셨나 보군요. 자, 들어오세요.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그 말은 열려라 참깨 같은, 마술의 주문처럼 들렸고, 다음 순간 나는 보이지 않는 줄에 묶인 듯 스스럼없이 남자의 뒤를 따라 회사 안으로 들어갔고, 응접실처럼 꾸며진 어떤 곳에 멈춰 서게 되었다. 전면에 TV가 있고 그 주위에 활 모양으로 푹신해 보이는 의자가 네 개 있었다. 세 개는 비었고 하나에만 사람이 앉아 있었는데, 깨끗한 암회색 정장 차림의 남자였다. 뒷모습만 볼 수 있어서 정확한 나이를 가늠할 수는 없었지만 희끗희끗한 머리칼이나 등 뒤로 풍겨 나오는 분위기로 보아 오십대 중반은 됐을 것 같은 사람이었다.
남자는 소리가 나오지 않는 TV를 열심히 시청하고 있었다. 가끔 남편이 보곤 하는 코미디 프로 전문 채널에 맞춰져 있었는데 낯익은 코미디언들이 나와서 무엇인가를 연기함에도 소리가 나오지 않아 마치 마임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잠시만 저쪽에 앉아 기다려주시겠습니까?” 안내한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 예의 웃음을 흘리고는 오른쪽에 나 있는 복도로 사라져버렸다. 나는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그가 가리킨 소파에 앉았다. 회사 안은 직원이 전혀 없는 듯 너무도 조용했다. 어딘가에 걸린 시계의 초침소리만이 들리는 것의 전부였다. 나는 시선을 둘 곳을 찾지 못해 TV에 잠깐 눈을 맞췄다. 어떤 코미디언이 어떤 코미디언의 머리를 쟁반으로 세게 두들겨 대고 있었다.
큭큭, 목에 뭔가가 걸린 사람이 그것을 뱉어내려는 듯한 소리가 그때 들려왔다. TV앞에 앉은 남자에게서 나오는 소리였다. 어깨를 들썩거리며, 남자는 계속해서 큭큭거렸다. 방금 본 코미디언들의 모습이 웃겼던 걸까?
순간 남자의 목이 돌아가며 얼굴이 나타났다. 놀이기구에 탄 꼬마의 웃음 같은 것이 그 얼굴에 매달려 있었다. “보셨어요? 보셨죠?” 들뜬 목소리가 날아왔다. “정말 재밌죠?” 나는 남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실망한 듯, 웃음을 거두고 풀이 죽은 목소리로 물었다. “재미없습니까?”
나는 무슨 말인가를 해야 한다고 느꼈지만 쉽게 입이 열리지 않았다. 남자는 잠깐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미간을 구기더니 목을 돌렸다. 나는 그제야 팔에 소름이 돋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by 디오니 | 2005/07/25 12:08 | 실패한 텍스트의 행렬 | 트랙백 | 덧글(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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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저기요~? at 2009/10/06 01:35
훙포한 잎은 최민호 작가님의 작품중의 하나인데 최민호 작가님인가요?
Commented by 디오니 at 2009/10/06 08:21
네, 제가 맞습니다만, 뉘신지?
Commented by 아뇨. at 2009/10/07 22:46
꽤나 좋아하는 작가님 블로그일 줄은 몰랐네요..
Commented by 디오니 at 2009/10/10 16:27
제 글을 좋아하신다니 반갑네요. 늘 좋은 하루 보내시길.
Commented by 팬도있어! at 2009/10/10 13:46
와...
Commented by 디오니 at 2009/10/10 16:28
팬이신 줄은 잘 모르겠지만, 네, 좋다고 하시는 분이 계시네요. 고마운 일이죠.
Commented at 2009/10/13 12:59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디오니 at 2009/10/14 09:50
우리 부부는 모두 잘 있다네. ^^
경한이 번호는 메일로 보내주지. 건강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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