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박살나게 될, 연인 (1) 실패한 텍스트의 행렬

본 픽션은 작자의 취향과 하등의 상관이 없음을 밝힙니다. ㅎㅎ

나름대로 에스에프.


(주제곡은 쳇 베이커의 My Funny Valentine)


================================================================================



나의 박살나게 될, 연인



고통이 없다면 인생이 무슨 재미가 있겠어?

- 도스토예프스키, 까라마조프의 형제들 중



‘미메시스’를 처음 본 것은 -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의 ‘일부’를 처음 본 것은 물론 광고에서였다. 토요일이었고, 아내를 만나기 위해 카페로 향하는 중이었다. 카페가 45층에 자리 잡고 있었던 탓에 엘리베이터를 타야했고, 때문에 강제광고를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햄버거나 옷 따위의, 언제나 마주치는 흔해빠진 광고가 아니었다.

하얀 팔이 바닥에 덩그렇게 놓여 있었다. 망치를 든 손이 나타나더니 그 팔을 힘껏 내리쳤다. 팔은 충분한 강도로 내려쳐졌음이 분명한 망치질에도 불구하고 움푹 파였을 뿐, 박살나지는 않았고, 곧장 원상태로 복구됐다. 그리고 선명한 문구 하나.


당신의 외로움과 함께합니다.

실제로 아픔을 느끼는 미메시스.

만질 수 있다면, 믿으세요. - MAYA


세부 정보가 나열되고 구매를 원하시면 지금 즉시 접속해달라는 문구가 떠오를 즈음 엘리베이터는 카페 ‘빛의 제국’에 도착했다. 꽤나 웃기는 카피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아픔을 느껴? 사람 사이에서도 그것은 알 수 없는 법이다. 그런데 로봇이 아파하는지는 어떻게 알아냈단 말인가?

아내는 2층에 앉아서 홀로그램을 보고 있었다. 카페의 1층 바닥에는 빛으로 만들어낸 푸른 강물이 흐르고 있었다. 나는 무연담배를 꺼내 물었다. 초콜릿 맛이 두통을 몰고 왔다. 천천히 걸어서 아내 앞에 도착했다. 아내는 물끄러미 나를 보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끊었다더니?” 아내가 말했다.

“그랬었지. 이틀 동안.”

“그거 알아? 끈기 없는 남자를 순서대로 세우면 당신은 맨 앞에 서게 될 거야.”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아내의 맞은편에 앉았다. 아내는 커피를 홀짝이고 잔을 내려놓았다. 탁자는 잔의 압력에 반응해서 색상을 변화시켰다. 천박한 인테리어. 아내와 딱 맞는 카페라고 생각했다. 이런 유치한 가구나 들여놓은 주제에, 빛의 ’제국’이라는 거창한 상호라니.

“정말 끝까지 가자는 거야?” 아내가 말했다. 나는 담배를 한 모금 빨았다. 빌어먹을 박하 맛으로 변해 있었다.

“끝까지 가자고는 안 했어. 그냥 아이만 양보해.”

“그게 그 소리잖아? 포기해. 당신 변호사가 가망 없다고 얘기 안 해줘?”

물론 해줬다. 나는 아내를 때린 전력이 있기 때문에 법원까지 가더라도 이길 확률은 거의 없었다. 변호사는, 내가 승소한다면 그야말로 법조계의 기적이라고 불러도 좋을 거라고 이빨을 드러내면서 말했다. 나는 새로 해 넣은 것이 분명한 그 이빨을 모조리 부숴버리는데 주먹을 몇 번이나 휘둘러야 될까, 잠깐 생각했었다.

나는 담배를 입에서 빼내 재떨이에 놓았다. 재떨이는 탁자 속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솟아올라왔다. 탁자가 빨갛게 변했다. “몇 번을 말해도 소용없어. 서현이는 내가 키워.”

“웃기시네. 언제 걔한테 관심이나 있었어?”

“적어도 당신 보다는.”

아내는 비웃음이 가득한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다가 불쑥 말했다. “어떻게 그렇게 확신할 수 있는데?”

“그냥 알아. 넌 자기 밖에 모르는 여자야. 원래부터 그렇게 생겨먹었으니까. 아, 그걸로 널 비난하는 건 아니야. 사자한테 넌 왜 불쌍한 사슴을 잡아먹느냐고 욕하는 건 멍청한 짓이지.”

“내가 사자라는 거야?”

할 말이 없었다. 원래부터 비유가 통하지 않는 여자였다. 아내는, 말하자면, 사전 같았다. 사전에는 절대로 은유나 직유가 들어가지 않는다. 단 하나의 단어도 대체하는 걸 허용하지 않는다. 만약 이미 구입한 사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가능한 길은 제한된다. 절대 내용물을 바꾸려들지는 말라. 다만 버리든지, 태우든지, 그것도 아니면 갈가리 부수든지. 그것뿐이다.

갑자기, 머릿속에 조금 전 엘리베이터에서 봤던 영상이 떠올랐다. 하얀 팔. 망치.

실제로 아픔을 느낍니다!

“뭐 하나 물어봐도 돼?” 내 뜬금없는 물음에 아내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계속해서 말했다. “전에 나한테 맞았을 때, 얼마나 아팠어?”

아내의 얼굴에서 서서히 핏기가 가셨다. “무슨 뜻이야?”

“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니야. 말 그대로 얼마나 아팠는지 궁금해서. 얼마나 아팠어? 그냥 따끔한 정도였나? 아니면 죽을 만큼 아팠어? 상상할 수 있는 최대치를 100으로 놓으면 어느 정도였지? 70? 80? 아니면….”

“개새끼.”

아내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리고 싸늘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봤다. 아내가 입을 열었다. “법원에서 봐. 네가 가진 걸 다 뺏어주겠어.”

아내가 사라지고, 대신 아내가 마시던 커피 잔과 마주앉았다. 보온기능 때문에 반쯤 남은 커피 위로 여전히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고 있었다. 아내는 언제나 뜨거운 커피를 고집했다. 아내가 저 커피를 내 얼굴에 뿌려버렸다면, 정체모를 물질로 만들어진 인조피부를 이식 받아야 하는 사태가 벌어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살찐 돼지의 엉덩이 외피로 만들어진.

다행히 사전에는, 이미 기록된 것 이상을 상상할 능력이 없었다.


덧글

  • without0 2006/06/15 18:24 # 삭제 답글

    요즘, 어째 영 재미가 없어.
    심심해.
  • without0 2006/06/15 18:26 # 삭제 답글

    아, 위에 소설이 그렇다는 게 아니라, 내 생활이.
    그리고.
    요즘 대체로 글의 성향이 노골적으로 폭력적이 되어 가는 듯.
    으흠..... 작가의 취향과 무관한 거 확실해?
  • 디오니 2006/06/16 01:51 # 답글

    확실히 직장인이 되었다는 뜻이 아닐까? ^^
    무관한 거 확실하다니까. ㅎㅎ ^^
  • without0 2006/06/16 09:35 # 삭제 답글

    다음으로 명세서 보냈음.
  • 성원 2006/06/16 10:14 # 삭제 답글

    이것도 재밌긴 한데 <음모자들> 그 다음 얘기가 궁금해요~
  • 디오니 2006/06/23 03:16 # 답글

    성원양, 이거 다 끝났으니, 일주일쯤 기다리면 그 다음 얘기가
    나올지도 몰라. ㅎㅎ.
  • 도열 2017/10/16 15:03 # 삭제 답글

    안녕하세요 emp충격기가 이슈가 되어 흘러흘러 들어와 7편을 보게되고 관심이 생겨 1편을 봤습니다
    작가님의 취향과 무관하다니 마음 편히 읽을 수 있겠습니다
    재미있는 글입니다
    폭력적인 성향을 내재한 주인공이 인간형 로봇과 공존하는 미래세계에서 다른 인간들과 거리를 느끼며 충분히 소통하지 못해 더욱 고립감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원래 성향이 그런것인지 세상에서 느끼는 괴리감에서 비롯된 비틀린 소통방식인지가 궁금하네요...
    세상 전반에 느끼는 염증을 아내라는 특정인물에게 몰아 표출하게 되다 그 주변 인간형 로봇들에까지 확산시키게 되는건가요? 자신의 그런 욕구를 본능이라 표현하고 오히려 합리화 하는 것 같네요
    자연스럽게 자기성찰보다 합리로 기우는 모습을 보니 악마가 눈을 뜨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ㅎㅎㅎ
    이후 진행이 궁금하네요 아직 등장인물들도 다 모르지만 종국에 어떤 결과로 마무리될지 기대됩니다
    아마도 파..국을 맞겠지요..?
    파괴적인 주인공의 행보가 살짝 두렵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지만 글에 묘한 흡입력이 있어 계속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면서 보고싶어지네요 주인공의 성격이 그가 쓰는 비유와 잘 어우러져서 확 드러나는게 작가님의 캐릭터 묘사방식이 매력적이네요
    10년도 전에 쓰신 글이네요.. 이 덧글을 보실 수 있을지 의문이 들지만 재미있게 읽었기에 글을 남깁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댓글 입력 영역